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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1970년대의 흑백 풍경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았다. 한국어교실에서 번역한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읽고, 컴퓨터에서 두 번이나 봤는데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영화는 역시 작은 화면이 아니라 큰 스크린과 음향 효과가 있어야 "영화"로서 완성되는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봤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산화해 간 날,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973년 2월, 나는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의 한 공장에서 시다로 일을 하게 됐다. 추운 겨울날,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옆구리에 끼고 첫출근을 하던 그 고갯길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영화에 나오는 어린 여공들은 "나"이기도 했다. 첫 월급으로 5600원을 받았다. 일당은 하루에 200원으로 30일 중 28일을 일하고 받은 돈이었다. 당시 라면 한 개가 20원, 연탄 한 장이 20원이었던 시절, 그 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 집의 유일한 현금 수입이었다.

평화시장의 시다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이 찾아와, 평화시장을 그만두고 다른 공장을 알아봐 두었으니 그 공장에 다니며 저녁에는 야간학교에 다니라고 했다. 교복과 책가방, 신발, 교과서 등 여동생이 쓰던 것이라며 가져다 주었다. 학교에 내야할 자치회비도 대신 내 주셨다. 그 야학은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참삶의 집>이라는 곳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그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그 뒤로도 여러 공장을 전전했지만, <참삶>은 오래오래 마음에 남았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도 그곳에서 시작됐다.

가끔 그 선생님을 생각한다. 지금은 어디서 살고 계실까. 그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미싱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 공장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 그 선생님의 격려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1970년대의 풍경이 흑백영화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2014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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