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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のつぶやき:買い物

오래간만에 남편 옷을 사러 백화점에 나갔다. 바지가 없다, 없다고 노래를 부르는 남편, 뒷주머니가 다 헤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전에 히라카타에 긴테쓰백화점이 있을 때는 1년에 한 두번은 필요한 옷들을 사러 같이 나갔었는데, 긴테쓰백화점이 없어진 후에는 교토나 오사카까지 나가야 해서 영 불편하게 됐다. 최근 5,6년은 서로 바쁘기도 하고 시간이 안 맞기도 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각자도생(各自圖生)'해 왔다. 나는 한 학기에 한 두번 교토의 책방에 나갔다가 다카시야마에 들려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고, 남편은 퇴근하는 길에 교바시의 다이에에서 필요한 물품을 각자 조달하는 식이었다.

먹고 사는 건 시장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게 정말 큰일이다. 왜 이렇게 사야 하는 것이 많은지, 간장을 사오면 설탕이 떨어지고, 그 다음날은 또 커피콩이 없고 늘 이런 식이다(오늘 점심도 스파케티를 해 먹었는데, 마늘이 없어서 그냥 마늘 없는 스파케티를 먹었다(゚ー゚; ).

아무튼 저녁에 모리구치 역에서 남편을 만나기로 하고 나는 좀 일찍 집을 나섰다. 그 동네 구경도 좀 하고 출장 가방이 겨울색인데다 너무 무거워서 가볍고 봄여름에 들 만한 가방을 하나 고르려고 여기저기 둘러 보았다. 전에는 브렌드 가방을 파는 곳이 한 곳밖에 없었는데, 두 곳으로 늘어난 듯했다. 괜찮은 가방을 하나 점찍어 두고, 비올 때 신을 만한 구두도 보러 갔다. 마음에 드는 구두가 있기는 했는데, 사이즈가 없단다. ㅠㅠ.

남편을 만나 바지를 고르고 티샤쓰도 몇 장 샀다. 나간 김에 워킹화도 하나 필요하다고 해서 구두까지 샀다. 몇 년치 가이모노를 한꺼번에 한 듯했다. 바지 길이도 한 시간 정도면 줄여준다고 해서 백화점 식당가에 올라가 회전초밥을 먹었다. 스시는 또 몇년만인가? 스시는 한 접시에 100엔, 150엔, 250엔, 500엔 등 몇 가지 종류가 있었다. 먼저 시원한 맥주를 한 잔하고 내가 좋아하는 차완무시까지 먹으니 대만족!!.

바지를 찾아 가지고 나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갑자기 15도까지 기온이 내려가 추웠다. 모리구치시역에 있는 커피콩 파는 집에서 킬리만자로를 50%세일한다고 해서 커피콩도 사서 집으로 왔다. 짐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2015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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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1970년대의 흑백 풍경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았다. 한국어교실에서 번역한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읽고, 컴퓨터에서 두 번이나 봤는데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영화는 역시 작은 화면이 아니라 큰 스크린과 음향 효과가 있어야 "영화"로서 완성되는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봤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산화해 간 날,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973년 2월, 나는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의 한 공장에서 시다로 일을 하게 됐다. 추운 겨울날,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옆구리에 끼고 첫출근을 하던 그 고갯길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영화에 나오는 어린 여공들은 "나"이기도 했다. 첫 월급으로 5600원을 받았다. 일당은 하루에 200원으로 30일 중 28일을 일하고 받은 돈이었다. 당시 라면 한 개가 20원, 연탄 한 장이 20원이었던 시절, 그 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 집의 유일한 현금 수입이었다.

평화시장의 시다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이 찾아와, 평화시장을 그만두고 다른 공장을 알아봐 두었으니 그 공장에 다니며 저녁에는 야간학교에 다니라고 했다. 교복과 책가방, 신발, 교과서 등 여동생이 쓰던 것이라며 가져다 주었다. 학교에 내야할 자치회비도 대신 내 주셨다. 그 야학은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참삶의 집>이라는 곳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그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그 뒤로도 여러 공장을 전전했지만, <참삶>은 오래오래 마음에 남았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도 그곳에서 시작됐다.

가끔 그 선생님을 생각한다. 지금은 어디서 살고 계실까. 그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미싱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 공장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 그 선생님의 격려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1970년대의 풍경이 흑백영화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2014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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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인간답게 산다는 것

한국에서 날라온 <녹색평론> 잡지를 읽다 보니 벌써 6시가 넘었다. 빨리 밥을 앉히고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슈퍼로 향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흰 보름달이 저만치 동남쪽 방향에 떠 있었다. 그렇지, 달은 낮에도 떠 있는 거였지. 그러고 보니 오늘이 추석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요도가와 강 넘어 북쪽 산으로 저녁 노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 <녹색평론>은 읽을 거리가 많았다. 우자와 히로후미(宇沢弘文)의 「지속적 발전과 사회적 공통자본」(『経済セミナー』、日本評論社、2003.8)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에서 제기된,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적 존엄과 혼의 자립이 보장되고, 시민적 권리를 충분히 향수할 수 있는 사회-그러한 사회가 어떤 제도와 조직을 만들면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경제학자들의 문제로 인식한다는 대목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지평을 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Wealth of Nations>(1776)의 중심 테마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애덤 스미스가 이 책을 쓰기 위해 17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 이 책을 쓰기 전에 39살에 출판한 <도덕감정론>이란 책에서도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깊히 파했쳤는데 그가 강조한 것이 '동정심sympathy'이라고 한다. 동정심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惻隠之心)일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하는 사회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며, 그런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답하기 위해 <국부론>을 집필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답게 사는 것은 기쁨이라든지 슬픔에 관한 인간적인 감정을 솔직히 표출하고 상호 소통하면서 공동작업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238년 뒤인 2014년,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는가, 인간답게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사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내가 10대 후반부터 고민했던 화두이기도 하다. 가난하고 암울했던 10대에 나는 부자가 아니라 인간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50고개를 넘은 나는 어떠한가. 인간적인 감정을 솔직히 표출하고 살고 싶으나 현실은 감정을 억누르고 숨기고 산다. 상호 소통하면서 살고 싶으나 늘 제한된 공간에서 갈증이 느끼며 살고 있다. 공동작업으로서의 생활은 현대 도시 생활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앞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만들어야 가야 하는 것이므로.
 
그런데 "사람들의 인간적 존엄과 혼의 자립이 보장되고 시민적 권리가 최대한 향수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를 모색하는데, 그 제도를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 '사회적 공통자본'이라고 한다. 사회적 공통자본이란, 첫째, 대기와 숲, 토양, 물과 같은 자연환경,  둘째, 도로, 철도, 공공교통기관과 같은 사회적 인프라, 셋째, 교육, 의료, 금융과 같은 사회적 제도를 사회적 공통자본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적 공통자본을 관리, 유지하고 거기서 생산되는 서비스를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 형태로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경제학의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정말 현재의 모든 문제는 사회적 공통자본을 한낱 기업의 돈벌이로 생각하거나, '사회 정의'와는 다른 기준, 즉,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로 보는 데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한국에서 철도의 민영화에 반대하는 것, '영리병원'의 설립을 반대하는 것, 고등교육의 공적인 부분을 회복하는 것 등도  경제학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겠다.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자본권력 앞에서 "인간의 존엄과 혼의 자립이 보장되는" 삶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경제학의 과제일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그나저나 올 추석의 보름달은 너무 밝고 환하다. 달빛에 후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 달을 보고 소원을 빌었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인간적인 삶'이 가능하기를...
 
2014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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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광화문 광장

8월 12일부터 18일까지 한국에 다녀왔다. 서울은 생각했던 것보다 시원했다. 시원하다 못해 15일 밤은 추워서 전기장판을 켜고 잤다. 입추가 지나자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졌다고 했다. 매년 이맘 때면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올 여름 서울에는 장마철에 비가 사흘밖에 내리지 않아 땅이 딱딱하게 굳어 매미가 지상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들 했다.

나의 일정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기간(14일-18일)과 겹쳤다. 12일 김포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안국동으로 가면서 보니, 광화문 광장은 16일에 있을 시복식(諡福式 가토릭에서 순교자들에게 사후에 복자(福子)로 추대하는 것)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광화문 광장에 들리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그런데 원래 16일에 예정되었던 철도여행이 취소되어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광화문 광장을 지나치게 되었다. 4시 반쯤이었는데 행사는 다 끝나고 사람들이 횡단보도 옆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친구에게 물으니,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위해 단식하고 있는 장소라고 했다. (아, 나는 단식 장소가 시청 앞인 줄로만 알았다.)

나는 다가다 서명을 하고 노란 리본을 받았다. 영화 시작까지는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광화문 광장을 이곳저곳 서성였다. 다시 보니, 거기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고 한 가운데에는 세종대왕의 동상이 있었다. 권력의 거리였다. 광장 한편에는 세월호 참사를 그린 시와 그림이 길게 붙어 있었다. 4월 16일 이후의 유가족들을 뉴스가 아니라 가까이서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날 그 자리에서 프란시스코 교황이 그 앞을 지나다 차에서 내려 34일째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단식하고 있는 유가족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교황의 가슴에는 유가족이 건낸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며 방한 기간 내내 세월호 유가족들을 챙겼다고 한다. 노란 리본을 내내 달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날 본 영화 <그 사람, 추기경>은  2009년 2월에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기록영화였다. 엄중하던 군사독재 시절 큰 힘이 되셨던 분, 낮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 주신 분,  노쇠한 몸으로 병마와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하시던 분. 관람객은 열댓 명밖에 없어 썰렁했으나 <그 사람>의 메시지는 강렬하고 감동적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또 광화문 광장에 들렀다. 천막이 제대로 쳐지고 단식하는 분들도 다 모여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삼천 배를 하고 있었다. 백팔배라고 상관없다고 했다. 국회에서 진상규명을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특별법을 합의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 옆에서 조금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많은 생각을 안고 일본에 돌아오니, 여전히 땡볕 더위에 새벽부터 메미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2014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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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また、玉ねぎ

어렸을 적의 나는 식성이 꽤 까다로운 아이였다고 한다. 반찬이나 국에 들어간 파나 양파, 마늘 같은 것을 다 골라내고, 가리는 음식도 많고, 잘 먹지를 않아서 엄마가 고생했다고 한다. 그런 나에 비해 여동생은 먹성이 좋아서 뭐든 잘 먹는다고 늘 칭찬을 받았다.

식성이 바뀐 건 스무 살 전후였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이나 포장마차에서 파는 꼼장어나 곱창, 닭똥집 같은 것도 잘 먹을 수 있게 됐다. 세상 사는 법을 조금씩 배우면서 가리는 음식도 점차 줄어들었다. 물론 파나 양파, 마늘도 잘 먹게 됐다. 파김치, 양파장아찌, 마늘장아찌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다. 파김치는 겨울 음식이고, 양파장아찌와 마늘장아찌는 장마철부터 시작해 여름내내 먹었다(아, 마늘장아찌도 먹고 싶다!).

요즘 들어 매일같이 양파를 먹고 있다. 양파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은 처음 알았다. (암튼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계기는 6월초 교토의 어느 식당에서 나온 양파반찬이었다. 그집은 정식 한 가지만 파는 집인데, 밥과 된장국에 반찬이 5가지 정도 나온다. 그냥 양파를 크게 썰어 파프리카와 함께 간장과 미림을 넣고 조린 반찬이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반찬 이름인 즉, '신다마네기니모노'. "아, 양파만으로도 반찬이 되는구나."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날 이후 나도 매일 양파반찬에 도전하고 있다. 콜레스트롤을 줄이는데도 좋다고 하니 일석이조다. 오늘 남편의 도시락 반찬에도 양파와 사쓰마아게를 조려서 넣어 주었다. 한국에서는 한때 양파즙을 먹는 게 유행이었는데, 이번 여름에 한국에 가면 나도 양파즙을 먹어봐야겠다.

2014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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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玉ねぎ

오늘은 6월 들어 차일피일 미루던 '다마네기' 장아찌를 만들었다. 어렸을 적엔 '다마네기'가 한국어인 줄 알았다. 집에서 엄마가 '양파'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늘 다마네기라고 했기 때문이다. 철이 든 후에야 다마네기가 일본말인 줄 알았지만, 한번 입에 벤 말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세 개에 198엔 하는 큰 다마네기가 아니라, 아이들 주먹 만한 작은 다마네기를 발견한 건 2주 전쯤이었다. 한 봉지에 열대여섯 개가 들어 있는 게 298엔이라고 했다. 나는어렸을 적에 먹던 다마네기 장아찌가 생각나서 얼른 한 봉지를 사 가지고 왔다. 그런데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하나 둘 꺼내 먹다 보니 작은 양파가 6개밖에 남지 않았다. 할 수 없이  6개만으로 장아찌를 담갔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는 해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신다마네기가 나오면 다마네기 장아찌를 담갔다. 몇 개 정도를 담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항아리나 두 항아리를 담갔으니까 족히 5,60개쯤은 되었던 것 같다. 장마가 시작되면 다마네기 장아찌를 꺼내 고춧가루와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무친 것이 매일 같이 밥상에 올랐다. 밥맛이 없을 때 찬밥을 물에 말아 다마네기 장아찌와 같이 먹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다. 다마네기 장아찌의 사각사각 씹히는 맛도 좋았다.

다마네기의 껍질을 까서 깨끗이 씻어 물기를 닦아 놓고 간장을 다렸다. 간장에 미림을 조금 넣고 펄펄 끓이니 온 집안에 간장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릴 때 간장 다리는 냄새를 아주 싫어해서 하루종일 집밖에 나가 놀던 기억이 나서, 혼자 웃었다. 다린 간장에 식초를 조금 넣고 식혀서 매실주를 담그는 항아리에 다마네기를 넣고 간장을 붓고 마른 고추 두 개를 넣고 뚜껑을 닫으니, 다마네기 장아찌 완성!

내친 김에 큰 다마네기로는 피클도 만들었다. 다마네기 피클과 장아찌를 만들고 나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제 한 열흘쯤 지나면 다마네기 장아찌를 먹을 수 있겠지. 장마가 다 끝나기 전에 다마네기 장아찌를 무쳐서 찬밥을 물에 말아 먹어 봐야지.

2014년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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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오랜만의 외출

25일 오래간만에 남편과 함께  영화를 봤다. (쓰고 보니 25일은 크리스마스였다. 24일까지 학교 일로 바빴으니까 분명히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 기분이 아니어서 그런지 엊그제 일인데도 그냥 보통 날로 기억되어 있다.) 남편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해서 따라나선 나는 무슨 영화인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전철 안에서 다시 무슨 영화냐고 물었더니 <한나 아렌트>라고 했다.

어디서 상영하는지, 몇 시 영화인지,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나선 것이다. 그가 보고 싶은 영화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일 테니까, 어디든 데려가 줄 테니까. 교토시네마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120여석쯤 되는 좌석은 만원이어서 서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팝콘을 먹거나 음료수를 홀짝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라는 유대계 미국인 철학자의 실제 있었던 일을 그린 이 영화는, 1960년대를 시대배경으로 나치스 관계자의 재판을 방청하고 발표한 글로 인해 커다란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과정을 쫓고 있다. 절대 악이란 무었인가? 생각하는 힘을 되물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친구들이 떠나가고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마지막 강의는 압권이었다.

나치스 관계자가 악의 화신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을 간파한 것이, 지난 역사를 마주하고자 하는 일본사람들에게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영화관을 나오며, 생각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은 언제든 나치스 관계자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이 영화가 다시 생각난 것은 프레시안의 실린 남재규 전 노동부장관의 인터뷰 기사였다.("박근혜, 공안청치 넘어 분쇄정치로 이동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1226195332) 한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철도노조 파업 관계자를 잡는다며 경찰이 민주노총에 난입한 사태에 대해,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해 강제력을 동원하면 할수록 박대통령의 권위도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권위와 강제력은 상반되는 것이다. 한 쪽이 절대적으로 지배할 때, 다른 한 쪽은 사라진다. (Power and violence are opposite. Where the one rules absolutely, the other is absent.)"

그렇다면 권위가 추락하면 추락할수록 강제력은 강해질 것이 아닌가. 역사는 때때로 너무 가혹한 시련을 준다. (하느님은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고 했던가...)

영화를 보고 시조의 다카시마야백화점에 들려 쇼핑도 했다. 나는 목도리와 시계를 사달라고 미리 주문해 둔 터였다. 남편은 모아둔 상품권으로 내 목도리를 사 주었다.나는 남편에게 동전 지갑을 사 주었다. 작은 시계의 시계침이 노안으로 잘 보이지 않게 돼서, 돌아오는 길에 히라가타에서 1,2,3,4숫자가 큰 시계도 샀다. 오랜만의 외출은 피곤했다.

2013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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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 안녕! 크리스마스

2013년의 크리스마스 아침, 창문의 커튼을 모두 젖히니 따뜻한 햇살이 들어온다. 어제는 몇년을 미루고 미루던, 남쪽 거실에 자외선 차단 필름을 바르는 공사를 했다. 공사는 아저씨 두 분이 오셔서 세 시간정도 걸렸다. 아파트의 대규모 보수공사도 거의 끝나가서 베란다도 깨끗하게 정리돼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한국에서는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대자보(대학 등에서 손글씨로 크게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 등을 종이에 써서 붙이는 것)가 유행이라며, 친구가 자신의 안녕치 못한 상황을 전하면서 내게도 안녕하냐고  안부를 물어왔다. 나? 나도 안녕하지 못하다. 시간을 쫓아가지 못해 헉헉거리며 1년을 보내서, 힘든 마음을 숨기느라 많이 웃질 못해서, 스트레스와 감기, 갱년기 증상으로 여기저기 몸이 비명을 질러서, 바다 건너 한국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들 때문에.

22일에는 수배 중인 철노노조 파업 관계자를 잡는다며 백주대낮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경향신문의 건물에 입주해 있는 민주노총 사무실을 55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난입했다고 한다(신문은 '강제 진입'이라고 전했다). 유리문을 깨고 최류액을 뿌리며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짓을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사진과 영상이 시시각각 인터넷 상으로 전해졌다.

철도노조 파업의 단초가 된 '민영화'의 광풍 앞에 노동자의 삶은 풍전등화와 같다. 민주노총은 총파업과 '정권 퇴진' 운동을 선언했다(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올 한해 내내 지루하게 이어졌던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과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종교계가 나서 현 정권의 퇴진 요구로 이어졌다(그러고 싶지 않아도 길은 그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던 1987년, 민주화운동은 아직 진행 중이다.

"기쁜 성탄!"이라는 메일이 한국의 친구에게서 날아왔다. '기쁜'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지 않는 성탄절이라니! 그러고 보니 올해는 크리스마스 케롤송을 들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2013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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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心の時計

갑자기 겨울이 찾아왔다. 마음의 시계와 현실 시계가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이제 풍경과 계절도 어긋나 버린 것일까? 창밖의 풍경은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데, 나의 계절은 겨울이다.

학생들에게 지금 계절이 가을이냐 겨울이냐고 물으니 가을이란다. 아직 거북이가 용수로에 있는 것을 보면, 길거리의 은행나무의 푸루죽죽한 색깔을 보면, 겨울이 아닌 것이 맞기는 맞는데, 나만 혼자서 가을을 건너뛰어 여름에서 겨울로 온 것일까? 모내기가 끝난 논에 다시 푸른 색이 나도는데, 아직 서리가 내리기도 전인데, 어깨의 통증 때문일까?

한국에서는 여름에서 겨울 사이에 지난 대선(대통령선거) 때 국정원의 선거 개입 범죄가 명명백백 드러나기 시작했다. 범죄를 범죄가 아닌 것처럼 꾸미는 것이 늘상 보던 형사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현실이라는 것이 영 낯설기만 하다. 내가 외국에 오래 살아서일까?

2013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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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콩장

오늘은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콩장을 만들었다. 시장을 보러 갔다가 계산대 근처에 있는 건강식품 광고가 눈에 띄었다.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콩 식품"이라고 쓰여진 포장지에는 삶은 메주콩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작년에 사 둔 검은콩이 생각났다. 기타오지 근처에서 검은콩과 녹두를 발견하고 너무 기뻐서 두 봉지 사다 놓고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음, 콩장을 만들어 볼까?

콩장은 검은콩을 물에 불렸다가 간장과 미림, 설탕을 넣고 조린 밑반찬이다. 설탕 대신 물엿을 넣기도 하는데, 김, 깻잎장아찌와 더불어 어렸을 때 즐겨먹던 반찬이다. 신정 때 먹는 일본의 '구로마메'는 크고 오래 끓여서 부드럽고 단맛이 특징인데 반해, 콩장은 작고 씹히는 맛에다 짠맛인 것이 다르다.

집에 돌아와 검은콩을 꺼내 물에 담가서 불렸다. 근데, 콩장을 어떻게 만들더라? 일본에 온 뒤로 콩장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훗, 웃음이 났다. 그래도 먹던 기억이 있으니 못 만들 것도 없지. 몇 시간 불린 뒤에 간장과 미림, 설탕을 넣고 조렸더니 그런대로 콩장 비슷하게 되었다. 성공!!

저녁 반찬으로 올라온 콩장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콩장을 만들면서 불린 콩을 조금 남겨 두었다. 내일은 다른 잡곡과 섞어서 콩밥을 해 먹어야지. ^-^(나는 잡곡밥을 좋아하는 편인데, 남편 식성에 맞추다 보니 거의 해 먹지 못한다. 내일은 밥을 두 번 해야겠네.)

2013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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